박남수는 '흠돌의 난'에 관해 화랑세기 필사본과 '영랑, 배장 전기'에서 서로 교차되는 부분을 비교하면서 화랑세기 필사본이 창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요컨대 花郞世紀 殘本의 사건과 내용 구성은 영랑의 사례와 같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에 보이는 사건 등을 기초로 등장인물의 상관관계를 추구하고, 다시 그 사이사이에 새로운 가공인물을 배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위 논문 67쪽)" 이런 방식으로 화랑세기 필사본 전체가 '창작'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대단히 부실하다. 기존 사서와 화랑세기가 별개의 자료임을 보여주는 예시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굳이', '마복자'등의 예를 들었기 때문이다. 본인은 기존 학자들의 예시와 다르게, '미시랑'에 관한 부분을 예로 설명해 보겠다. 삼국유사 탑상 편, '미륵 선화 미시랑과 진자사(眞慈師)'에 보면, 진흥왕대에 원화를 폐지하면서 설원을 국선으로 삼아 화랑을 만들었다는 유래가 나오고, 진지왕 대에 있었다는 국선 미륵 선화 '미시랑'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이 부분은 화랑의 유래와 설치, 풍월주, 국선에 관한 부분이므로, 만약 화랑세기를 '창작'하려 한다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럼에도 두 자료가 다르다는 것은 화랑세기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참고해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이런 화랑의 설치와 연원에 관해서는 이종욱 교수를 비롯한 많은 연구자들이 서술하였으므로 넘어가고, 본인은 이 기사에 등장하는 '미시랑' 자체에만 집중해서 풀어보겠다. 우선 삼국유사에는 미시랑의 이름은 '미시(未尸)'이며 성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진지왕이 그를 국선으로 삼았으며, 7년이 지난 뒤 사라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기록된 풍월주, 아니 화랑 중에는 '미시'라는 사람이 없다. 대신 비슷한 이름의 여성인 '미실'이 등장할 뿐이다. 그리고 진지왕 때 국선으로 삼은 사람은 '문노'이며, 국선을 거쳤으면서 7년간 화랑의 우두머리였던 사람도 문노뿐이다. 하지만 문노의 세계는 가야 출신으로 정확히 기록되어 있으므로, 성은 알 수 없다는 말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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